728x90 반응형 전체 글6739 애니메이션 세계사 Ep.11 · 세계를 잘라 먹는 정치인들 — 길레이와 롤런드슨은 풍자화를 어떻게 읽히게 했나 식탁 위에 세계가 놓였다.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마주 앉아 칼을 든다. 둘이 자르는 것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다. 지구 모양으로 만든 커다란 플럼 푸딩이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향해 손을 뻗고, 피트는 바다가 포함된 훨씬 큰 조각을 접시로 가져간다. 전쟁의 원인과 전황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 한 끼의 식사만으로 두 권력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드러난다. 1805년 2월 26일 발행된 제임스 길레이의 판화 《위기에 처한 플럼 푸딩》은 사건을 차례로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의 장면에 인물, 국제 정세, 탐욕에 대한 판단을 겹쳐 놓는다. 독자는 두 정치인이 무엇을 먹는지 알아보는 순간, 식탁을 둘러싼 대화에 끼어든다. 다만 그림은 영국의 승리를 선전하는 단순한 도식으로 끝.. 2026. 10. 13. 휘파람과 총성도 음악이 될 수 있는가 —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황야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 · 7회 · 음악론총잡이는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관객의 몸은 이미 결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회중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짧은 선율이 끝나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총보다 먼저 음악에 붙잡힙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서부극 음악을 떠올리면 휘파람, 전기기타, 말 없는 목소리가 먼저 귀에 돌아옵니다. 익숙한 선율을 흥얼거리는 일은 쉽지만, 그것이 영화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는 일은 조금 다릅니다. 왜 이 음악이 흐르면 황야가 넓어지고, 얼굴이 더 낯설어지며, 몇 초의 기다림이 견디기 어려운 시간으로 변할까요. 이번 글에서는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를 중심으로 음악이 인물과 장면의.. 2026. 10. 12. 빛으로 벽을 움직인 기계 — 마술환등의 세계사 영화가 태어나기 오래전, 사람들은 이미 어두운 방에 모여 벽 위에 나타난 거대한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때로 성인의 삶을 들려주었고, 달의 표면과 낯선 도시를 보여주었으며, 죽은 자의 유령이 관객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계가 마술환등이었다. 그러나 마술환등은 단순히 영화가 발명되기 전에 잠시 사용된 불완전한 영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빛을 소유하고, 누가 이미지를 선택하며, 누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할 권리를 갖는지를 새롭게 조직한 매체였다.먼저 답하면: 마술환등이란 무엇인가마술환등은 램프에서 나온 빛을 유리 그림이나 사진 슬라이드에 통과시킨 뒤 렌즈로 확대하여 벽이나 스크린에 투사하는 장치다. 17세기에 실용적인 형태가 나타났고, 18세기.. 2026. 10. 11. 첫 촬영 전에 영화는 어떻게 준비되는가 — 각본을 일정과 장소로 바꾸는 사람들 ㉚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카메라가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각본에는 ‘밤, 문을 닫은 극장’이라고 적혀 있을 수 있지만, 촬영하려면 실제 극장을 찾아 사용 시간을 협의하고, 필요한 배우와 스태프를 모으고, 빛과 소리를 어떻게 다룰지 정해야 합니다. 한 줄의 장면이 여러 사람의 작업과 며칠의 일정으로 펼쳐지는 시간, 이것이 프리프로덕션, 곧 촬영 전 제작 준비입니다. 지난 ㉙편에서는 좋은 이야기가 예산과 투자, 제작 결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결정된 영화를 실제로 찍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깁니다. 준비 단계의 핵심은 계획을 한 번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부서가 같은 영화를 상상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한쪽의 결정이 다른 쪽의 일정과 비용에 어떤 변.. 2026. 10. 11. '기생충',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인가 비교인가 가난은 돈이 부족한 상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순간 더 선명해지는 감정일까? 봉준호의 《기생충》은 가난한 가족과 부유한 가족을 한 집 안에 들여놓으면서 계급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감각으로 바꾸어놓는다. 돈과 소득의 차이는 영화 내내 존재하지만, 관객에게 더 강하게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반지하의 창문과 저택의 계단, 폭우와 정원, 음식과 냄새처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차이다. 김기택의 가족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가난이 가장 고통스럽게 드러나는 순간은 굶주릴 때만이 아니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자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때다.그래서 《기생충》을 단순히 빈부격차에 .. 2026. 10. 10. 선인도 악인도 돈 앞에서는 다르지 않다-'석양의 무법자'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 | Vol.3전체 20편 중 6번째 · 《석양의 무법자》(1966) 수많은 무덤 사이를 한 남자가 달립니다. 그가 찾는 것은 죽은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죽은 사람 곁에 숨겨진 황금입니다. 카메라가 묘지를 훑고 음악이 점점 커질수록 관객도 그가 원하는 무덤을 빨리 찾기를 바라게 됩니다. 《석양의 무법자》는 전쟁의 죽음이 쌓인 공간에서 탐욕의 질주를 눈부신 영화적 쾌감으로 바꾸며, 우리가 누구의 욕망을 따라가고 있었는지 뒤늦게 돌아보게 합니다. 세르조 레오네의 세 번째 달러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블론디, 리 밴클리프의 엔젤 아이즈, 일라이 월릭의 투코를 남북전쟁의 혼란 속에 놓습니다. 세 사람은 남부군의 사라진 황금을 추적하지만, 전쟁의 승리나 공동체의 미래.. 2026. 10. 9. '아름다운 직업'은 왜 남성성의 가장 아름답고 잔혹한 영화가 되었나? | 세계 영화 100 #07 세계 영화 100 #07황량한 사막에서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이 몸을 단련한다. 철조망을 넘고, 땅을 파고, 서로를 밀어내고, 바다에서 훈련하며 군인으로서 요구되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그러나 클레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Beau Travail, 1999)에서 이 훈련은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이상할 만큼 아름다운 춤에 가깝다. 강한 남성의 몸을 과시하는 군대가 오히려 욕망과 질투, 불안과 억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으로 바뀐다. 영화의 사건만 놓고 보면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지부티의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하던 갈루 상사는 새로 들어온 젊은 병사 상탱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적대감을 느끼고, 존경하는 지휘관 포레스티에가 상탱을 인정하기 시작하자 그 감정은 질투와 파괴적인 집착으.. 2026. 10. 8. 얼굴보다 먼저 총을 뽑은 배우 —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반영웅의 탄생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전체 20편 중 5번째 · 인물론 | 클린트 이스트우드 모자 아래로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의 짧은 시가가 조금 움직입니다. 상대가 말을 쏟아내는 동안 총잡이는 쉽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무엇을 이미 알아차렸는지 궁금해집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침묵은 감정이 없는 사람의 침묵처럼 보이지만, 화면 안에서는 남들보다 한발 먼저 상황을 읽는 사람의 여유로 작동합니다. 그 얼굴이 처음부터 영화사의 아이콘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트우드는 미국 텔레비전 서부극에서 익숙한 배우가 된 뒤, 세르조 레오네의 유럽 서부극을 거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 2026. 10. 7. 애니메이션 세계사 Ep.10 · 런던의 몰락을 여섯 장에 담다 — 윌리엄 호가스는 어떻게 그림으로 사회를 이야기했나 젊은 여성이 짐을 들고 런던의 여관 앞에 도착합니다.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낯선 여성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겁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오가고 성직자는 지나가지만, 누구도 이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만이 등장인물의 표정과 몸짓,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위험을 짐작합니다. 다음 그림에서 여성은 이전과 다른 방에 있고, 또 다음 그림에서는 관리들이 문으로 들어옵니다. 어느 순간의 변화도 눈앞에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섯 장을 차례로 보는 동안 관람자는 그림 사이에 생략된 시간과 그동안 일어났을 사건을 스스로 이어 붙입니다. 1732년 윌리엄 호가스가 판화로 발행한 《창녀의 편력》은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과 그를 둘러싼 런던을 이야기했습.. 2026. 10. 6. 복수는 왜 두 사람을 동업자로 만드는가 — 《석양의 건맨》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 | Vol.2전체 20편 중 4번째 · 《요짐보》와 《황야의 무법자》 → 《석양의 건맨》 →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반영웅의 탄생두 남자가 같은 현상 수배서를 바라봅니다. 한 사람은 돈을 먼저 계산하고, 다른 사람은 표정 뒤에 목적을 감춥니다. 둘은 상대가 유능하다는 사실을 곧 알아보지만, 그 능력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습니다. 《석양의 건맨》(1965)은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순간보다 손을 잡고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시간을 길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세르조 레오네는 《황야의 무법자》에서 두 세력을 조종하던 한 명의 떠돌이를 내세웠습니다. 두 번째 서부극에서는 그 자리를 두 명의 현상금 사냥꾼에게 나누어 줍니다. 젊은 만코는 돈을 좇고, 나.. 2026. 10. 5. 영화 이전의 세계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그림자극과 움직이는 이미지 영화는 카메라가 발명된 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빛과 막 사이에 인형을 놓고, 손과 막대로 형상을 움직이며, 목소리와 음악을 더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눈앞에 불러냈습니다. 그림자극은 영화의 미숙한 예고편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종교·서사·풍자·공동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독립적인 공연문화였습니다.그림자극은 왜 영화사에서 중요한가?그림자극은 빛, 스크린, 움직이는 형상, 음악, 목소리와 관객을 하나의 시간 안에 결합했습니다. 이 요소들은 훗날 영화 상영에서도 다시 만나지만, 그림자극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영화와 그림자극의 관계는 단순한 조상과 후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두 문화의 만남으로 .. 2026. 10. 4. 좋은 각본은 왜 곧바로 영화가 되지 못할까 — 제작 결정과 투자, 예산을 움직이는 사람들 ㉙ 각본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는 말은 다릅니다. 한 이야기를 촬영하려면 그 이야기를 사용할 권리뿐 아니라 배우와 스태프를 고용할 비용, 장소와 장비를 확보할 일정, 촬영이 끝난 뒤 영화를 완성할 자금까지 맞아야 합니다. 지난 ㉘편에서 기획개발의 시간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그 이야기 앞에 놓인 다음 질문을 따라가겠습니다. 누가 무엇을 확인하고, 어떤 책임을 맡기로 해야 영화가 촬영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만들고 싶다’는 의사와 ‘만들 수 있다’는 판단제작사가 좋은 각본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오래된 동네 극장이 문을 닫는 날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관계와 결말을 다듬었고, 감독도 이 영화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극장 건물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밤 장면을 .. 2026. 10. 4. 'Her',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고, 기억하고, 위로하며, 함께 웃고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존재에게 몸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할까? 스파이크 존즈의 《Her》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기술의 형태로 되돌려놓는다. 인간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사랑한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상대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주인공 테오도르는 타인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편지를 써주는 일을 한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그리움을 문장으로 옮기는 데 능숙하지만, 정작 자신의 관계는 실패했고 이혼을 앞둔 상태다. 그는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는 않지만 깊은 외로움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런 테오도르가 만나는 존재가 운영체제 사만다.. 2026. 10. 3. 브래드 피트의 두 속편과 돌아온 고질라—연휴에 살펴볼 해외 신작 소식 익숙한 인물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반갑다. 그러나 속편의 흥미는 단순히 ‘다시 만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그 이야기를 이어받는지, 첫 영화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휴에 눈여겨볼 해외 영화 소식 세 가지가 바로 그렇다. 클리프 부스는 다른 감독의 영화 속에서 다시 등장하고, 고질라는 전후 일본의 이야기로 돌아오며, 오랫동안 멈춰 있던 《월드워 Z》 속편은 새로운 제작진과 함께 재추진되고 있다.타란티노가 쓰고 핀처가 연출하는 클리프 부스의 다음 이야기《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가 돌아온다. 신작의 원제는 《The Further Mis-Adventures of Cliff Booth》... 2026. 10. 2. 사무라이는 어떻게 이름 없는 총잡이가 되었나 — '요짐보'와 '황야의 무법자'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 | 비교 편전체 20편 중 3번째 · Vol.1 《황야의 무법자》 → 《요짐보》와 《황야의 무법자》 → Vol.2 《석양의 건맨》먼지가 흩날리는 거리에 한 남자가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문 뒤에서 그를 살피고, 마을을 차지한 두 패거리는 낯선 이의 무기가 자기편이 될 수 있는지 계산합니다. 남자는 사정을 듣더니 떠나는 대신 머물기로 합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돈을 벌 수 있고, 서로를 증오하는 두 집단의 욕망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낡은 옷과 칼을 놓으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1961)가 시작됩니다. 판초와 권총을 놓으면 세르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가 시작됩니다. 떠돌이가 두 조직 사이를 오가고, 붙잡힌 여성을 가족에게 .. 2026. 10. 2.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왜 아직도 미래의 영화인가? | 세계 영화 100 #06 세계 영화 100 #06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인류가 달에 발을 딛기 전이었고, 개인용 컴퓨터도 인터넷도 인공지능과의 일상적인 대화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달 기지와 우주정거장, 영상통화와 평면 디스플레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컴퓨터를 아무렇지 않게 화면에 등장시켰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술적 상상보다도, 그 기술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묻는 방식이 지금도 낡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는 흔히 SF 영화의 혁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우주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나 특수효과의 역사로만 바라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큐브릭이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우.. 2026. 10. 1. 정의가 사라진 자리에 돈이 왔다 — 《황야의 무법자》 Vol.1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 Vol.1서문: 마카로니 웨스턴의 탄생 → 《황야의 무법자》 → 《요짐보》와 《황야의 무법자》 → Vol.2 《석양의 건맨》한 남자가 노새를 타고 국경 마을 산미겔에 들어옵니다.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물가에서는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다 총잡이들에게 쫓겨나고, 거리에서는 네 명의 사내가 낯선 이의 노새를 향해 총을 쏘며 웃습니다. 교회 종을 치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 죽은 자가 늘어난다고 알리고, 관을 만드는 피리페로는 장사가 잘될 것이라며 낯선 이를 바라봅니다. 고전적인 서부극이라면 이 순간 총잡이는 억압받는 주민의 사정을 듣고 정의를 회복할 임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황야의 무법자》의 이름 없는 남자는 마을을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 2026. 9. 30. 애니메이션 세계사 Ep.09 · 그림 속으로 들어간 목소리 — 중세의 밴더롤은 말풍선의 조상인가 천사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천사의 입에서 나온 라틴어 문장은 허공을 가로질러 마리아에게 향하고, 마리아의 대답은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어떤 그림에서는 문장이 공중에 그대로 적히고, 다른 그림에서는 길고 가느다란 두루마리 위에 놓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누가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이 누구에게 도착하는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언자의 손에도 문장이 적힌 띠가 들려 있다. 그것은 지금 내뱉는 대사일 수도 있고, 오래전에 기록된 예언일 수도 있으며, 화면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이름표일 수도 있다. 형태만 보면 현대 만화의 말풍선과 닮았지만, 중세의 그림에서 글은 반드시 일상적인 대화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림 속 인물이 입을 열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보이는 물체가 되어야 했다. 밴더롤 .. 2026. 9. 29. 미국의 서부는 왜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는가 — 마카로니 웨스턴의 탄생 황야를 다시 쏘다 · 마카로니 웨스턴의 세계서문 — 장르의 탄생 → Vol.1 《황야의 무법자》 → 《요짐보》와의 비교 → Vol.2 《석양의 건맨》서부극은 미국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신화였습니다. 황야를 건너는 마차와 철도, 법이 닿지 않는 마을과 그곳에 도착한 총잡이는 실제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탄생했다고 믿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였습니다. 원주민의 땅을 개척자의 빈 공간으로 바꾸고, 폭력을 질서의 시작으로 정당화하며, 고독한 백인 남성을 공동체의 구원자로 세운 장르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이 가장 미국적인 장르의 중심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이동했습니다. 로마의 제작자들이 돈을 모으고, 스페인의 사막과 마드리드 근교에 서부 마을을 세웠으며.. 2026. 9. 28. 누구의 세계영화사를 다시 쓸 것인가 — 중심이 하나가 아닌 영화의 지도 영화사는 오랫동안 1895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시작됐다. 그 날짜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날짜가 너무 밝게 빛나는 동안, 그 빛 바깥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고 보여주고 받아들였던 수많은 사람과 장소가 어둠 속에 남았다. 새로 쓰는 세계영화사는 1895년을 지우는 대신, 그 날짜가 영화의 탄생으로 기억된 이유와 그 기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함께 기록하려 한다.우리는 이미 훌륭한 영화사를 가지고 있다세계영화사를 새로 쓴다는 말은 기존의 영화사를 폐기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연재의 출발점은 정반대다. 수많은 연구자가 영화의 형식과 기술, 산업과 사조를 분류하고, 흩어진 필름과 문서를 찾아내며,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왔다. 데이비드 보드.. 2026. 9. 27. 영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 기획개발, 원안, 각본을 만드는 사람들 ㉘ 영화가 끝나면 배우와 감독 뒤로도 수많은 이름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한 영화의 시작을 물으면 우리는 흔히 감독이 떠올린 아이디어나 작가가 쓴 시나리오 한 권을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어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지 찾고, 그 이야기를 사용할 권리를 확인하고, 여러 차례 글을 고치며, 제작에 필요한 사람과 자금을 연결하는 과정이 촬영보다 먼저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영화의 기획개발이라고 부릅니다. 이전 제작진 직책 ①편에서는 감독과 프로듀서, 촬영감독의 큰 차이를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앞선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영화가 아직 화면을 갖기 전, 기획자와 개발 담당자, 작가와 제작사는 무엇을 검토하고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영화는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출발점은 다양합니다. 작가가 쓴 독창적인.. 2026. 9. 27. 이전 1 2 3 4 ··· 32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