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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영화/Film Review 영화 리뷰

해무-김윤석 박유천의 살 떨리는 대결, 해무가 가득한 우리를 본다

by 조각창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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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연우소극장에서 초연을 올렸던 <해무>가 영화화되었습니다. 봉준호가 감독이 아닌 제작자로 처음 선택한 영화라는 사실과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작가인 심성보가 감독 데뷔로 택한 이 영화는 역시 최고였습니다. 이미 연극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해무>는 영화로 재탄생하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바다를 잠식한 해무, 흔들리는 전진호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해무가 가득한 바다 위 작고 낡은 배 위에서 벌어진 잔인한 현실은 두렵게 다가올 정도입니다. 그저 뱃사람으로서 평생을 뱃일을 하며 살고 싶었던 이들의 운명을 잔인하게 파괴해버린 그날의 기억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오직 배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밀항은 모두가 파멸할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무>는 지난 2001년 실제 있었던 사건이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2001년 10월, 중국인 49명, 조선족 11명이 태창호에 숨어 2001년 10월 전라남도 여수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사건이 바로 <해무>의 원작이었습니다. 밀입국 과정에서 탑승객 일부가 질식사하자 선장과 선원들이 사망한 26명을 바다에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논란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숨겨진 진실을 극적으로 이끈 작가의 힘이 곧 <해무>라는 걸작으로 이어졌습니다.

 

작고 낡은 배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인간 내면의 극단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충동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인간군상은 단순히 연극이나 영화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해무>속 상황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강렬하게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해무>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는 상황은 부담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침몰하는 배만 봐도 그런 생각들이 가득해질 정도로 어쩌면 국민 모두에게 세월호 참사는 지독한 집단 트라우마를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뱃사람으로만 살아왔던 강선장 철주(김윤석)와 선장의 말은 무조건 따르는 갑판장 호영(김상호), 뭔지 모를 비밀이 많은 기관장 완호(문성근), 거칠고 돈만 밝히는 롤러수 경구(유승목)와 오직 여자에만 목말라 있는 선원 창욱(이희준), 그리고 해고를 나와 이제 막 뱃사람이 된 동식(박유천)은 한때 여수 앞바다를 주름잡았던 '전진호'와 한 배를 탄 인물들입니다.

 

 

과거의 영광과는 달리 현재의 '전진호'는 감척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를 구하기 위한 철주의 노력과 그 안에서 그저 뱃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던 선원들의 이야기는 섬뜩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작은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지독한 이야기는 숨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며 관객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잘 나가던 때 철주는 하루에 다방에서 200만원을 쓸 정도로 돈 많이 벌던 뱃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척 대상이 된 낡은 '전진호'만이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횟집을 하는 아내는 이미 자신과 멀어진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온갖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오히려 당당한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전부였습니다.

 

선주는 국가에서 진행하는 노후선을 교체하는 감척 사업을 통해 '전진호'를 처리하겠다고 나섭니다. 자신이 낡은 그 배를 사기 위해 대출을 받아보려 노력도 하지만, 그에게는 대출 받을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바다로 나가도 제대로 고기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뱃사람을 먼저 챙기는 철주는 '전진호'를 살리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잡히지 않는 고기를 대신해 밀수를 선택한 철주는 하지만 그 대상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섬뜩해합니다. 하지만 이미 선택한 상황에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현실. 철주는 '전진호'를 살리고 함께 하는 선원들을 위해 해서는 안 되는 밀항을 준비합니다.

 

 

망망대해에서 멈춘 배. 그리고 선원들에게 통보하듯 전해진 밀항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에게 던져진 돈. 선원들은 갑작스러운 선장의 선택에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돈에 모든 것을 수락합니다. 물론 근저에 남아있던 불신은 두텁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파도가 거친 저녁 중국선을 통해 조선족들이 전진호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홍매(한예리)가 바다에 빠지자 운명처럼 동식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듭니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지독한 사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구한 인연은 순박하기만 했던 동식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들은 가장 극단적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지독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오직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선장과 그런 선장의 말은 모두 따르는 선원들, 그리고 생전 처음 하는 밀항에서 벌어지는 지독한 상황들은 이들 모두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조선족들 중 교사인 중년 남성에게 감정이입을 한 완호와 오직 여자만 바라보는 경구와 창욱은 밀항하는 여성과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만 노력할 뿐입니다.

 

선장이 배를 구하려 선택했던 이번 일에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따르는 갑판장 호영은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이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의 우선순위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서 더욱 집요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거친 파도와 지도선으로 인해 조선족들을 어창에 가둬야 했던 그들은 의외의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지도선만 지나가면 끝이라 생각했던 그들 앞에 어창 안은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지독한 고기 냄새에 질겁하던 그들은 프레온 가스가 터지면서 집단 질식사를 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홍매에 첫 눈에 반한 동석은 마치 선견지명이라도 하듯 그녀를 기관실로 옮겼고, 그 선택은 홍매를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었습니다.

 

밀항을 하던 조선족들이 모두 숨진 상황에서 집단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던 선원들 앞에서 선장 철주는 도끼를 들고 숨진 이들을 내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 떠있게 하지 말고 고기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철주의 눈은 이미 광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성은 사라지고 지독한 인간의 악마성이 내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치열한 내면들이 충돌하며 <해무>의 진짜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는 각자의 이유 때문에 죽은 조선족들을 도끼와 칼로 내려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홍매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동식에게는 오직 그녀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철주가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듯, 동식에게는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특별함 그 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독한 해무가 전진호를 잠식하며 시작된 이 잔인한 상황은 그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을 인간 내면의 극단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유도해갔습니다. 각자의 신념과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이들과 살아남은 한 사람 홍매를 구하기 위해 이들과 대적하는 동식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연극에서 이미 검증된 <해무>는 영화라고 다를 수는 없었습니다. 탄탄한 이야기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했습니다. 연극배우들로 구축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은 왜 그들이 선택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증명해주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 달리, 아이돌 스타인 박유천의 동식 연기는 군더더기 없이 바로 동식이었습니다.

 

전진호를 위해 미쳐가는 철주 역을 완벽하게 한 지독한 연기를 선보였던 김윤석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동식 역을 연기한 박유천의 대립은 <해무>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잘 짜여 진 각본에 의해 물 흐르듯 이어졌고, 영화를 보는 내내 숨죽인 채 그들의 변화를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침몰하는 전진호와 함께 침몰하는 철주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만사 온갖 감정들이 하나로 모아진 묘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지독하고 오묘한 표정으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철주의 마지막은 섬뜩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드는 이질감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배를 지키기 위한 뱃사람 철주와 달리, 오직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두와 대립했던 민석이 6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식당에서 라면에 청량고추를 달라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은 기막혔습니다.

 

철주가 평생을 함께 했던 전진호의 침몰과 함께 하며 만들어냈던 오묘한 얼굴 표정이 6년이 흘러 우연히 보게 된 홍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식의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친딸일질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며 홍매의 목소리만으로 그녀임을 직감한 동식의 그 표정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함으로 가득했습니다.

 

 

<해무>는 편하고 쉬운 영화는 아닙니다. <명량>처럼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해적>처럼 코믹함으로 무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박유천을 보러 간 팬들에게는 섬뜩한 영화 속 현실에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인간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린 <해무>는 올 해 최고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연기 삼박자가 완벽했던 이 영화들 속에서 관객들은 다양한 경험들을 했을 듯합니다.


인간이 극한에 처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한 <해무>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과 적나라함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와 그렇게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 그 지독한 현실은 그저 영화 속 전진호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관객들이 먼저 알았을 듯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해무>에서 자연스럽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극한으로 치닫던 전진호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장의 선택 하나로 모두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고 그런 위기 속에서 각자 서로 다른 가치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과정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지독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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