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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시선으로 Another View
Film 영화/Film Review 영화 리뷰

경주-홍상수 그림자를 밟고 7년 전 춘화를 찾는 경주에서의 무박 2일 여행기

by 조각창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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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리>라는 작품을 만들었던 장률 감독의 그의 두 번째 한국 도시 이야기로 <경주>를 택했습니다. 거대한 묘를 중심으로 도시가 존재하는 이 독특한 공간은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경주를 바라보는 시선들 역시 제각각일 수밖에는 없지만 말입니다. 장률 감독은 과거 이리 폭파사고를 테마로 <이리>를 만든 것과 달리, <경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그만의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춘화와 윤희,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주 이야기

 

 

 

선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북경에서 살던 최현(박해일)은 공항에서 해맑게 웃는 어린 아이와 엄마와 마주합니다. 담배를 끊었지만 여전히 담배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을 바라보는 어린 여자 아이와 그런 아이를 보며 "그저 냄새만 맡을 뿐이야"라는 최현의 삶은 끊어버린 담배와 버리지 못한 담배와 유사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선배와 그런 선배의 죽음과 관련해 다른 선배가 던진 이유는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던 선배. 결혼과 함께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아내와만 살아가던 그는 3년 차가 되던 해부터 아내와 말도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의 신뢰성은 누구도 검증할 수 없는 그저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선배의 술 한 잔 더 하자는 권유도 뿌리친 채 현은 경주로 향합니다. 죽은 선배와 함께 했던 마지막 여행지인 경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아니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는 순간 가졌던 결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선배와 함께 했던 경주. 그 경주 한 찻집에서 봤던 춘화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 든 현의 경주행은 자연스러웠습니다.

 

경주로 온 그에게 7년이 흐른 그곳은 과거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하게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바로 <경주>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안내소에서 중국어를 건네던 여성과 찻집 주인,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과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담담하지만 흥미롭게 이어졌습니다.

 

장률과 박해일의 만남은 재미있게도 홍상수 감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담담한 시선으로 깊이를 느끼게 하는 홍 감독의 스타일이 장률 감독의 영화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박해일이 홍상수 감독 영화에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지만,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마치 홍상수 감독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배우 같다는 느낌을 받게도 합니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묘한 지점을 오가는 이들의 모습은 그저 흥미롭기만 합니다. 그저 귀찮아 던진 중국어에 화답하듯 반갑게 반겨주던 안내소 여직원과의 묘한 만남의 시간들,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호함 속에서 감정들만 소비하는 과정들은 영화 내내 최현의 감정들의 정점이었습니다.

 

여전히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춘화를 찾아 찾은 그곳은 7년 전과는 달랐습니다. 있어야만 하는 그곳에 춘화는 없고, 벽지만이 존재했습니다. 찢어진 구멍 사이를 바라보는 최현과 그런 그가 당황스러운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는 그를 변태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후배이자 과거의 연인이었던 여진(윤진서)를 기다리며 춘화를 보기 위해 들린 그곳에서 그의 새로운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전화 한 통화에 경주까지 내려온 여진은 불만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여진과 다투기만 하고 헤어진 최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과거의 기억, 그리고 과거의 연인이 자신에게 던지는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이와 유산 등 누군가는 큰 고통으로 담고 있던 아픔을 그는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여진의 이런 고백은 최현과 윤희의 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오게 합니다. 물론 그 균열이라는 가치의 기준은 묘한 지점에서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첫 방문에 변태라는 생각을 가졌던 윤희는 다시 찾은 최현과 시간을 함께 하며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소나기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나누기와 일본 여행객의 착각과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는 윤희. 그리고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최현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도 잔잔하지만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변태라고 경계했던 그 남자의 집요한 춘화 질문마저도 흥미로워진 윤희는 자신들의 모임에 최현에게 동참하자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한 그 자리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교수로 인해 윤희의 최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윤희가 현에게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윤희를 짝사랑하는 형사의 경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주>를 담고 있는 주제는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던 주인공이 북경에서 중국인 여자와 결혼해 살다, 선배의 죽음으로 인해 고국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선배와 함께 했던 여행지인 경주로 짧은 여행을 가서 느낀 짧은 여행기입니다.

 

하루라는 시간과 경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최현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한 지점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연인과의 짧은 만남. 그 속에서 뒤늦게 느끼게 된 아픔과 아쉬움. 이해하지 않았던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상상도 하지 못했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속죄는 윤희와의 그 짧은 만남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술을 마시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 온 윤희는 남편과의 사별 후 처음으로 최현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닫았던 문을 열어 놓은 윤희와 그 신호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현은 방 앞에서 잠시 망설입니다. 그 발걸음을 막은 것은 바로 낮에 봤던 후배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여진의 분노였습니다. 술김에 함께 잠자리를 했던 최현.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훌쩍 여진을 떠났었던 자신의 과거가 바로 윤희가 열어둔 방 문 앞에 함께 있었습니다.

 

 

공항에서부터 우연하게 만났던 모녀, 경주 공원에서도 재회했던 모녀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했다는 소식은 평범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죽음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은 이 장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드러나 있었습니다.

 

의외로 잘 어울렸던 신민아. 특별하지 않지만 미묘한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신민아의 모습 역시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장률 감독의 <이리>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윤진서는 카메오로 출연해 짧지만 중요한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주었습니다. 야하지만 야할 수 없는 춘화 찾기와 그 춘화 속에 담은 이야기는 <경주>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가치와 닮아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률의 <경주>는 분명 매력적인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술과 잠자리는 장률 감독의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차와 미묘한 감정,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벌어지는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냈습니다.

 

홍상수와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지점에서 일상과 그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장률 감독의 <경주>는 그래서 흥미로웠던 듯합니다.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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